[나의 향토문화답사기7] 수성최씨 시조묘

이성신 남양 주민자치회 역사문화 분과장

편집부 | 기사입력 2022/07/20 [13:06]

[나의 향토문화답사기7] 수성최씨 시조묘

이성신 남양 주민자치회 역사문화 분과장

편집부 | 입력 : 2022/07/20 [13:06]

화성시 기념물 제5호로 정해진 수성최씨 시조 묘로 가보자 마음먹고 매송면 숙곡리 산 81-1을 찾았다.

 

묘역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비슷하다. 고즈넉했던 시골길도 새로 개발된 도로 때문에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논밭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 있고 덤프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농촌 마을 변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이 변화에 네비게이션도 어지러운지 고가도로 밑을 돌아 논밭을 이리저리 꼬불거리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네비게이션이 없었다면 어찌 찾을까 걱정하며 농로를 따라 올라갔다. 산자락에 자리 잡은 한옥과 비석이 보였다. 비탈길을 천천히 올라가니 최근에 만들어진 묘역 입구에 안내판이 있었다. 

 

이 묘는 수성 최씨의 시조 최영규의 묘이다. 최영규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의 후손으로 원래는 김씨였다. 고려 원종 2(1261)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전서 겸 보문각 대경에 이르렀다.

 

고려 충렬왕 때에 지금의 수원인 수주 지역의 풍속이 퇴폐하고 기강이 문란하였다고 하는데, 그때 최영규가 수주의 호장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충렬왕은 그 공이 높다하여 수성백에 봉하고 최씨의 성을 내려 수성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호는 문해공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이 묘역의 주인공 수성백 최영규는 신라 경대왕 17대 손으로 고려왕조 중기의 관리로 성은 최씨이고, 본관은 수성隋城이다. 한림직학사 김민성의 현손이고, 증조부는 한림학사 병부상서 김효인이며, 조부는 좌정승 충순공 김현경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김 전이고, 어머니는 왕씨로 판삼사좌사 왕 창의 딸이다. 당대의 김씨 관리의 자제였음을 알 수 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를 당연하게 여기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다른 성을 내린 이유가 궁금했다.

 

안내판 옆에는 비문이 한글로 쓰인 신도비가 위용을 자랑하듯 서 있고 신도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화강암 좌대와 석담이 신도비 위용에 한몫하고 있었다.

 

안내판을 마주하고 있는 한옥은 속곳 차림의 여인 같았다. 미처 단청도 안 된 채 울타리도 없는 한옥 뒤뜰은 토사 방지를 위해 비닐막이 산자락을 감싸고 있었다. 이 한옥의 용도가 무얼까 생각해 보니 제례를 위한 준비 공간이 아닐까 싶다.

 

소나무 숲 사이로 언덕길을 오르니 묘역이 나왔다. 작은 운동장만큼 넓은 잔디밭 주변에 리기다소나무 묘목이 가지런히 둘러 서 있는 걸 보니 이곳도 최근에 조성한 모습이 역력했다.

 

묘는 아내인 이천서 씨의 합장묘로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고, 묘역에는 여러 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묘 앞에는 중앙의 장명등과 함께 좌우에는 문석인과 망주석, 석양과 석마 각 1쌍이 배치되어 있었다. 석물은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묘역 뒤에는 토신지위土神之位(흙을 주관하는 신)가 새겨진 표석이 있었다.

 

묘역에 있는 묘비도 한글 비문으로 새로 만든 것이었다. 200955일 후손들이 새로 세운 한글 비석에 쓰인 글을 보니 ‘860년 전 시조 문해공이 그 당시 수주를 잘 다스려 수주 백성들이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장례를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으나 자손들이 외지로 흩어져 묘가 실전되는 비운에 처했다. 후손들이 다시 찾고자 삼봉산을 헤매던 중 나무하는 아이를 만나 수성백 묘를 찾게 됐다는 일화가 기록돼 있었다. 한글 비문을 세운 후손들의 정성으로 당대의 영화도 860년의 세월 속에서는 모두 물거품이라는 걸 새삼 알게 해줬다. 이제야 조상의 애민정신과 충효 정신을 이어가고자 문화재로 지정해 작업하는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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