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칼럼] 우리도 이방인이었다

김현정 굿파트너즈 다문화사역팀장

편집부 | 기사입력 2020/03/25 [11:03]

[다문화칼럼] 우리도 이방인이었다

김현정 굿파트너즈 다문화사역팀장

편집부 | 입력 : 2020/03/25 [11:03]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어려운 가운데 학교가 개학을 연기하고 모임과 집회는 물론 스포츠 경기와 문화 행사도 취소된 상태다. 특히 산업 현장에서는 단 한 건의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피해가 없도록 방역과 예방에 만전을 기울이고 있다.

 

하루속히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진정 국면에 들어서길 바란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나라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고통과 설움은 배가 된다.

 

눈만 빼꼼히보이는 마스크를 써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프레스를 찍고 플라스틱 사출기가 돌아가는 산업 현장은 지금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바쁜 손길이 한몫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잔업도 마다치 않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쉬지 않고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근무시간이 길어 힘들지 않으냐고 물으면 생활비 아끼고 잔업수당을 모아서 고향의 가족에게 송금해야 한다.”며 배시시 웃는다. 보내준 돈으로 땅도 사고 집도 짓고 동생들 시집 장가도 보내 부모님들이 송금 날짜만 기다린다고 말한다.

 

1970년대에 미국에 가면 무슨 일을 하든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떠났던 우리나라 이민자들이 있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은 6·25전쟁이후 어둡고 침울하던 시기에 타국에서 일하면서 외화를 벌어 한 푼 한 푼 아껴 모아 한국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송금했다.

 

파독 광부 원병호 씨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 때의 고향은 비참하다 못해 처참하였다. 춥고, 배고프고, 혼란스럽고, 무시무시하던 때였다. 6~70년대 우리의 고향은 무척이나 가난한 보릿고개 시대였다.” 배고픔의 행렬이 끊이지 않을 때 하루 세끼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먼 외국의 노동자, 광부로 선택돼 기뻐하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수출된 노동자들의 외화벌이와 젊은이들의 희생이 없었고 타국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그 시대에는 누군가에게 낯선 이방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 한마디 통하지 않던 우리 젊은이들이 파독 광부로, 간호사로 낯선 땅에서 자리를 잡고, 초기 이민자로 미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잘 정착할 수 있었던건 근면하고 성실한 우리의 민족성도 있었지만 낯선 이들을 받아주고 수용해준 이들 나라와 국민 덕분이다.

 

우리나라가 국제 경쟁력을 갖춘 산업국가로 발돋움하는 데는 750만이 넘는 재외 교포들의 눈부신 활약과 고국에 대한 사랑이 큰 몫을 차지했다. 우리 동포들이 외국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해외 많은 나라처럼 이제는 우리도 새로운 이웃이 된 외국인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베풀 때가 되었다.

 

우리도 한때는 누군가의 이방인이었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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