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칼럼] 유적을 통해 본 남양도호부와 주변

이성신 남양 주민자치회 역사문화 분과장

화성투데이 | 기사입력 2022/01/19 [10:25]

[역사문화칼럼] 유적을 통해 본 남양도호부와 주변

이성신 남양 주민자치회 역사문화 분과장

화성투데이 | 입력 : 2022/01/19 [10:25]

 

현재 남양 지역으로 옮겨오기 전까지 이 지역의 중심지는 당성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구려 이전에 이 지역의 주인은 백제였다. 장수왕의 침략으로 이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이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 551년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빼앗긴 지역을 탈환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의 침공으로 다시 이 지역의 주인은 백제에서 신라로 바뀌게 된다. 이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한 신라는 얼마 후 당항성을 축성하였다. 현재 화성시 서신면 구봉산 정상부에 있는 당성(사적 제217)은 이 당항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당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0년대 이전 두 차례에 걸쳐 성벽과 북문지, 건물지, 외성지 등에서 이루어졌고, 한동안 중지되었다가 최근 다시 연차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조사를 통해 시기와 축조방법을 달리하는 1,2차의 성벽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1차성은 구봉산의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봉우리를 둘러쌓아 성을 축조)의 석축으로 둘레는 363m 이고, 성 내부에서 6~8세기대의 신라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이 성을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당항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2차성은 산 정상부 테뫼식 1차 성벽의 중앙부를 포함하고 동쪽으로 확장하여 계곡부를 감싸 안고 넓은 면적을 수용하여 쌓은 포곡식 형태의 산성이다. 통일신라의 유물이 주로 출토되고 있어, 통일신라 말기에 1차 성벽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의 협소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자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발굴단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이 유적이 당성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입증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현재 당성은 신라가 대중국 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점령한 당항성으로 비정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당항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진흥왕 14(553)부터 대중국 외교를 추진하고자 했던 거점으로 이를 기반으로 하여 통일신라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해를 통한 대중국 외교의 관문이었던 경기 서남부 지역을 획득함으로써 내륙과 해안을 하나로 합쳐 신라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와 관련하여 논의할 수 있는 유적이 당성에서 멀지 않은 서신면의 상안리 유적의 통일신라 건물지와 도로 유구(실마리가 되는 자취)이다. 서신면의 상안리 유물 산포지와 상안리 유적 1과 상안리 유적 2는 당성이 있는 구봉산(159m)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가지능선과 청명산(157.1m)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이 맞닿는 곡간부의 서쪽 경계면에 해당하는데, 백곡리 토성에서 멀지 않다. 이들 지역은 모두 남서쪽으로 서해바다가 조망되는 곳이다. 여기서 확인된 유구는 당성과 관련된 고대 교통로와 교통로를 지키는 임시 주거공간일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그 주변에서 확인된 2기의 건물지는 배수시설로 추정되는 석축 유구의 하단에서 출토된 기와와 토기를 바탕으로 늦어도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당성과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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